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展 (2)
* 지극히 주관적인 전시 리뷰입니다.
러시아 영화 전시를 지나면 드디어 4.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세 단계를 거치며 전개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이미지로 이루어진 '즉흥', 현실로부터 받은 자극을 형상화한 '인상', 그리고 즉흥과 인상으로부터의 얻은 여러 형태와 색채 그리고 이미지를 분석하여 재조합한 '구성'이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작품들은 감성에 기반한 추상이라는 점에서 표현주의적 추상으로 부른다.
즉흥 - 인상 - 구성에 몰두한 추상 표현주의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들 중에서 즉흥에 속하는 위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추상성이 뚜렷하게 표현된다. 작품 해석에 따르면, 나무와 숲, 사람, 석양의 하늘과 구름 등을 표현하였다지만 그저 그림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정확성을 바라면서 감상하면 안 되는 작품이 추상화이지 않을까?
1909년경에 제작한 '즉흥 No.4'와 비교했을 때 1917년에 제작한 '즉흥 No.217'은 더 확연하게 완전한 추상이 돋보인다. 추상 표현주의는 작품의 해석에 집중하여 의미를 찾기보단 회화에서 전해지는 느낌과 에너지에 더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어두운 회색과 밝은 회색 그리고 고동색이 뒤섞인 듯한 회색 타원 안에 어느 하나 쨍하지 않고 탁하게만 보이는 그림들이 뒤죽박죽으로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조화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부산스러운 글을 쓰며 이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정했는데 마냥 정신없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어지러움(모순된 말이지만)을 느끼게 해 줘서 오묘하게 매력 있었다.
* 칸딘스키의 작품은 단 세 작품만 전시되어 있다.
말레비치는 1915년에 절대주의를 선언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낼 수 있는 기하학적 요소를 사용하는 순수 추상이었다. 그에게 있어 절대주의는 인간의 정신적 힘이 자연의 창조력과 동등한 위치에 올랐음을 보여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미술이었다.
'절대주의 미술'이라는 형태를 말레비치가 창시했다는 것만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계에, 아니 1900년대 미술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회화의 모방적 집착에서 벗어나 기하학적인 추상성을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21세기에 보아도 매우 혁신적여 보인다.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만을 그린 말레비치는 "새로운 시대의 회화가 외부 세계의 어떤 것도 재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라고 전해진다.
회화의 가장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핵심을 찾기 위해, 인물, 풍경, 사건, 이야기, 신화와 같은 대상이 없는, 극단적인 절제를 통해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만 남겨 놓고 완전히 새로운 예술 체계 구성을 선언한 것이다.
말레비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세르게이 센킨의 작품은 다른 절대주의 작품들보다는 도형에서 입체감이 느껴진다. 같은 절대주의여도 평면감과 입체감에서 오는 차이가 느껴져 신기했다. 특히나 세르게이의 작품은 인테리어를 연상케 하는데 실제로 그는 1920년 이후 회화 작업을 그만두고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가구나 제품, 포스터 디자인 활동만 몰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5. 구상회화의 귀환
추상회화가 등장하던 시대에도 구상회화 속에서 자신들의 예술관을 녹여낸 미술가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들은 현실의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한 화면 구성 실험을 진행하는 '오브젝티비즘'이라는 구상미술을 등장시켰다.
스탈린 정부의 압박 속에서 많은 혁신 예술가들이 전통적 형태의 구상회화로 회귀하거나 탄압이 상대적으로 적은 포스터 디자인, 일러스트 등으로 예술 영역으로 옮겨갔다.
구상회화로의 회귀 작품을 보면 다시금 이전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의 형태와 비슷함이 느껴진다. 특히 아욱꽃은 찍어 칠하는 방식의 붓감이 느껴지고 꽃병 안에 담겨져 있지만 흐트러져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아욱꽃이 출렁거려 보인다. 쨍하지 않은 색감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더 단정해 보여서 눈길을 끌었다.
아욱꽃 작품과 비슷하게 밝은 베이지와 어두운 갈색이 대비되는 배경이 차분함을 느끼게 해 준다. 탁자의 나뭇결, 식탁보의 무늬 등은 매우 세세하여 실물감이 있지만, 탁자 위에 놓인 과일과 화병, 녹색 쌈지 등은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화된 형태와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를 함께 제시하여 가상과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혁명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재구 성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작품 해설을 듣다 보면 미술가들에게 강한 존경심이 든다.
나의 느낌, 전하고 싶은 메시지 등을 활자로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림에 의미를 넣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형식의 예술이란, 놀랍고도 매력 있다. 그래서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게 만든다.
생소한 작가들의 시대적 의미가 담긴 미술전을 처음 관람해보았다.
우선 '우와! 이 그림 예쁘다'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잘 그려진 이미지가 많아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나 러시아 아방가르드 태동기의 작품들과 구상회화로 회귀하는 후반대 작품들이 '소장'하고 싶은 그림의 매력이 있었다. 몇몇 작품은 그림 표면의 입체감이 두들어 져서 관람 기준선에 바짝 붙어 뚫어지게 감상하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어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스탈린 정권의 탄압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추상주의와 절대주의는 왜 칸딘스키와 말레비치가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강한 억압 속에서 그들이 피워온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예술은 미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표현하고 싶은 모든 열망이 담긴 것이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에너지였다.
조용한 평일 오전 시간대에 나긋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찬찬히 바라본 미술의 세계는 새로운 취향을 열어주는 듯했다. 동시에 창작자의 메시지가 담긴 모든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전은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지금 현재 러시아에도 푸틴 정권에 대한 감정과 하고 싶은 말을 예술에 꾹꾹 담고 있는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라고 혼자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