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던 휴학 시절, 영화 볼 시간이 많았다. 당시에 넷플릭스에 비포 시리즈가 다 들어와 있어서 하루에 한 편씩 선라이즈, 선셋, 미드나잇을 보았다. 그때는 설레고 낭만적인 선라이즈가 가장 기억에 남았었다. 줄리 델피가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차에서 책을 읽는 장면이 너무 예뻐 배경화면도 해두었었다.
어리고 활기찼던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의 로맨틱한 운명은 6개월 후의 만남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그로 9년 후, 프랑스 파리에서 이들은 재회한다. 사실 강렬했던 선라이즈와 현실감 넘쳤던 미드나잇 사이에 있던 선셋은 처음 봤을 당시에 인상 깊지는 않았다.
요즘 관심사가 프랑스에 있어서 이것저것을 찾아보다 불현듯 프랑스 파리가 배경이었던 이 영화가 생각이 났고 금요일 밤에 다시 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재밌어서 내가 나이가 들었는지, 경험이 생긴 건지 긴가민가했다. 적당히 낭만적이고 적당히 현실적인 그 중간을 다룬 이야기가 참 좋았다. 어느새 30대가 되었고 각자 사람도 만나보고 사랑도 해본 제시와 셀린은 로망보단 현실의 기반에서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결핍 등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난 무엇보다 이들의 대화 주제가 마음에 든다. 정말 다양한 영역의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끊기지 않는 티키타카, 핑퐁이 잘 맞는 리듬감이 생동감 넘친다. 대사로만 가득 채운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지루할지언정, 나에겐 어떤 영화보다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대화가 이토록 끊기지 않는 상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운명의 상대라는 말을 붙이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셀린 역의 줄리 델피다. 말하자면 셀린도 좋고 줄리 델피도 좋다. 셀린의 급진적이고 감정적인 모습이 꾸미지 않는 솔직함이어서 마음에 든다. 자신의 생각을 누구보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 매력적이다.
비포 선셋 하면 줄리 델피의 기타 치는 모습과 재즈 가수를 흉내 내는 마지막 장면을 가장 명장면으로 뽑을 수 있다. 사랑스러움과 고풍스러움이 한 번에 보이는데 없던 프랑스 여자에 대한 환상도 심어주게 만드는 매력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다. 어쩔 땐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여운을 남기는 좋은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끝을 보지 않은 아쉬움은 미련을 남긴다는 생각도 든다. 정답은 없다. 사랑도 관계도 꿈도 그 무엇 하나 딱 맞는 답이 없기에 인생이 불확실하면서 재밌는 것은 아닐까.
해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사랑이라는 가치는 더욱더 소중해진다.
숲을 이루지 못한 꽃은 외롭고 숲을 이룬 꽃은 시든다. - 이동진 왓챠 평
I guess when you're young, you just believe there'll be many people you'll connect with. Later in life you realize it only happens a few times.
네가 어렸을 때, 저곳에 너와 이어질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너는 그런 일은 오직 몇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겠지.
Reality and love are almost contradictory for me
나에게 현실과 사랑은 거의 모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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